나의여행/경상도여행

길거리에 그냥 언덕처럼있던 창녕 고분군과 박물관

빨강돼지 2013. 6. 8. 21:37

2013년 6월 7일 햇살이 사람을 쏴

죽일듯이 내리 쬐는 그런 날씨

그런 날씨에 창녕고분군에 왔다

이렇게 허허 벌판일거라고 생각은했지만

이렇게 뜨거운 햇살이 비추어질지 모르고

천천이 아침먹고 아니 아점을 먹고

점심때쯤 도착했는데 아  어쩔

둘러는 봐야겠지하면서 걸어 본다


 

 

고분앞으로 창녕 박물관이 있었다. 

주차하고 모여 하는느낌으로

그냥 무작정 걷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여기서 입장료를 먼저 계산하고

고분군을 봐야 했던 거다

몰랐어 반쯤 둘러본후에 입장료 계산하고 설명도 듣고



 

고분을 발굴했던 보습을 그대로 두어서

구경할수 있도록 했더라



 

고분의 형태를 알려주려 만든모형

근데 실제처럼 되어 있어서 약간 헷갈리던걸

요렇게 여러층의 다른 흑들로 다져서 만든묘



 

여러 부장품도 있어서 같이 전시



 

고분안에 진짜 묘의 모습

무섭다기 보다는 약간 신기



 

조기 흰종이 사람모양이

진짜로 시신을 놨던 모양으로 요런식으로 된묘

근데 죽지않았어도 같이 묻은거면

너무 무서운데



 

본격적으로 박물관 안쪽으로 들어가서

묘를 만들던 모습재연으로 볼수 있더라



 

돌을 깍도 다듬어서 나름균형을 맞추어서

묘를 만들었던데 평지에 땅을 파고

시신을 묻고 봉분을 만들어 입구를 닫아서 만든형태



 

요런식으로 덥고 사실 이무덤들은

 

창녕은진한의 불사국()으로서

비자화(비사벌()이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의 중심부에 교동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교동고분군은 인접한
송현동고분군과 더불어 5세기 전반에서

6세기전반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은 창녕지역

유력 집단의 수장급 무덤인 대형분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

가족이나 친연관계를 가진 자들의

·소형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에서 경주에 분포하는

돌무지덧널무덤 다음으로

 많은 양의 신라 계통 금속유물이

발굴되어 그 당시 창녕지역이 신라 중앙과

 정치적 관계가 밀접하였음을 보여준다.


라고 설명은 되어 있으나

실상은 밭이나 경작지로 많이 쓰여지고해서

많은 도굴이 일어나서 형태를 알수 없는 것도 많다고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을 전시

삼국시대 물품이라 그시대쯤의 묘일것으로본다고


 

내가 본 고분군 말고도 다른 고분군도

있었구나  그랬네


 

 무덤의 주인인 여자란다

약간 무서움


 

전시관 뒤쪽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서

바로 돌아 볼수 있었다

전국의 무슨길 무슨길처럼 여기도

길이름이 있었더라


 

눈에 보이는거이 다가 아녔어

전시관 반대편에도 계속 이던데

저렇게 있으니 그냥 갈아 엎어서 밭으로 사용했지


 

너무 많은데 너무 땡볕이라 멀리서 보는걸로

만족하고 찍사만 열심히

해설사가 계셔서 열심히 설명해주실때는

재미있게 들었는데 대충내용을 요약하면

삼국시대에 이름 모를 집안의 사람들로

가족묘나 친인척묘가 아닐까한단다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일본인에 의해 그 일부가

 발굴조사되어 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일부만 국내에 남아 있다.

당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형 고분군은

 횡구식(橫口式) 또는 횡혈식(橫穴式) 고분이었다고 한다.

 출토 유물은 금봉관을 비롯하여 순금이식(純金耳飾) 등

각종 귀금속으로 된 장신구와 동, 철제의 무구, 토기 등

 대량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남긴 발굴 보고서가 간단하여 교동고분군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라고 설명하시고 표시 되어 있었다.

가슴아푼 유적지 였음이야 그넘들은 그거

가져다가 뭘했을까?

예전에 다큐프로그램에서 본건데 그냥

지네 마당에다 우리나라 국보급 탑을 가져다

그냥 놨단다 보물인지도 모르고 ...

후손들도 일제시대 부터 거지 있었던거라

잘모르고 그냥 거기 산에도 들에도

그냥 있단다 여기서 나온것들도 아마그럴거여